4.0: 공손한 제시는 불쾌하지 않아!
헤밍웨이(He Means Way)는 헤밍웨이의 작품에 등장하는 글과 인터뷰, 회고록 등을 참고하여 만든 창작극이다. 산울림 고전극장의 취지를 염두에 두고 완전한 상상 대신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창작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쨌든 관객인 나는 연극이라는 하나의 여과장치를 거쳐 헤밍웨이를 바라보는 시간이었다. 따라서 이번 리뷰에서는 연극 ‘헤밍웨이(He Means Way)’를 출발점으로 삼아 이야기한다.헤밍웨이를 보여 주는 처음 보는 극단의 작품에서 이만한 만족감을 느꼈는지 돌아봤다. 극단 파동의 헤밍웨이(He Means Way)를 한마디로 ‘시원한 연극’이다. 사실주의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연극무대에서만 실현할 수 있는 창의적인 장면들이 곳곳에 배치돼 있다. 특히 헤밍웨이의 흐트러진 작업실에서 재현되는 <노인과 바다>의 한 장면은 텍스트 위에서 춤추는 상상력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데 성공적이었다. 연출가의 뚜렷한 표현력과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력은 관객으로 하여금 극에 쉽게 몰입할 수 있도록 했다. 숨은 의미를 억지로 집어넣기보다는 관객의 이해를 선택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산울림 고전극장에서 선보이는 ‘우리가 사랑한 영미고전’의 포문으로서 매우 탁월한 연극이었다.극단 송곳은 이번 기획에서 작품이 아닌 작가를 선택했다. 문학작품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것과 작가라는 한 인물의 생애를 가져와 보여주는 것은 접근방식에도 엄연한 차이가 있다. 심지어 우리가 사랑한 영미 고전이라는 카테고리 속에서 작가의 생애를 그린다는 것은 어쩌면 예정된 방향성, 즉 해당 연극 속에 작가를 바라보는 긍정적인 시선이 있는 것은 아닐까 추측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극단 송곳은 대문호 헤밍웨이의 생애를 그리는 방식에서 칭찬도 비난도 아닌 꽤 태연한 입장을 취했다. 헤밍웨이(He Means Way)는 인간 헤밍웨이의 모순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도 이에 대한 어떠한 의도도 드러내지 않았다. 무대 위에서 헤밍웨이를 제시하는 것만으로 판단은 관객의 몫이다.

주입된 잉크와 부모의 가장 싫은 점이 비슷하다고 한다. 헤밍웨이는 어린 시절 나에게 여자아이 옷을 입히고 첼로를 강요하던 어머니 그레이스를 증오했다.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일부 여자친구에게 돌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어느새 아들 그레고리에게 자신의 어머니와 똑같은 짓을 했다. 지독한 대물림을 헤밍웨이라는 대문호에게서도 본다니 낯선 것이 발견됐다. 헤밍웨이와 마찬가지로 부모를 거스르는 그레고리, 그런 그레고리 뒤에 서서 헤밍웨이를 바라보는 그레이스. 그러나 헤밍웨이는 무시한다. 그는 아직도 모순적으로 자기에게 평생 따라다녔기 때문에 헤어날 수가 없다. 홀복 드레스를 입고 있던 그레이스의 양 어깨에서 이어지는 레터링 문신은 원피스를 벗겨 보니 헤밍웨이의 문장으로 된 브래지어였다. 이완혁 연출은 레터링이 관객이 잘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며 아쉬워했지만 잘 보였다. 지금의 그레고리를 만들어낸 것은 명백히 아버지의 헤밍웨이임을 증명하듯 레터링은 선명했다. 오래전부터 천천히 새겨지지 않는, 이제 몸의 일부가 되어버린 문신은 뿌리칠 수 없는 족쇄이자 그레고리 자체가 됐다.

그레고리 헤밍웨이는 인물 중 가장 파격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함께 한 번도 무대 위를 빠져나오지 않는다. 존재만으로도 눈이 갈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무대 위의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마초라고 불리는 보편적인 모습이 아니라 모순덩어리에 동굴까지 있다. 아버지의 나쁜 행동을 지켜보던 그레고리는 무슨 생각을 하며 무대를 돌았을까. 모순적으로 점철하는 아버지의 전생을 부정하고 화를 내셨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레고리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은 아들이기도 했다. 어쩌면 아버지의 그런 태도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건지도 모른다. 무대에서 아버지를 지켜보던 그레고리의 심정에 대해 이호준 배우는 이와 비슷한 의도를 갖고 세밀한 감정 설정을 했다. 그레고리는 종을 치거나 컵을 건네며 무대 위에서 환상을 만들어 가는 역할을 해 왔다. 하지만 자신의 어머니가 등장하고 헤밍웨이가 아버지로 행동하게 된 순간부터 더 이상 자신이 개입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한다.그레고리 몸에 새겨진 잉크의 본래 소유자(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자신의 영향을 부정한다. 그레고리는 잉크의 책임을 따지려 하지 않았다. 다만 완성된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기를 또는 인정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어리석은 우리는 내 맘대로 크지 않은 아들에게 책임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든 내 영향을 거부한 망할 놈 취급한다. 그러나 그레고리의 가슴에 새겨진 문신이 반드시 그에게만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에도 그레이스와 클라렌스의 흔적이 몸 곳곳에 새겨져 있을 것이다. 의도나 영향은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되지 않는다. 의도하지 않은 일이라고 영향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에 대한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내 시선에 갇혀 개인적 의도에만 집중한 ‘너 때문’의 결과물이 여기 있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 내가 가장 싫어했던 모습을 이어가고 있다.

▲글씨와 총의 상관관계=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운명이었을까, 아니면 자의에 의한 결과물이었을까. 전쟁을 겪은 평화주의자들의 자기 연민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하는 위험한 생각도 든다. 인생을 꼭 객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지만, 헤밍웨이는 자신의 삶을 실제보다 더 무겁게 받아들인 것은 아닌지 무대 위의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에 등장하는 늘어진 시계 소품들을 보며 생각했다. 환상적이면서도 어딘가 정신착란적인 시계의 모습처럼 헤밍웨이는 자신의 이상에서 멀어진 현실에 혼란을 느껴 더욱 마주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무대 위의 소품들은 모두 헤밍웨이를 가리킨다. 난잡한 원고부터 위스키, 달리 시계와 박제된 사자머리까지.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그에게 끼친 영향이었고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꽉 찬 무대와는 달리 헤밍웨이는 한없이 고독해졌다.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은 그 애가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헤밍웨이의 그 아이는 그 자리에 있었다. 다만 그가 바라던 모습은 아니었다.

우리는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 극단 송곳은 바라보는 방향은 정해지지 않았다. 구원을 기다리던 불쌍한 평화주의자는 마침내 주위에 똑같은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의 최후를 놓고 모순덩어리의 비겁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지만, 처음으로 모순을 인정한 한 인간 나름대로의 마무리로 볼 수도 있다. 자신의 고통을 반영한 소설에는 온갖 모순이 다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팍팍한 세상을 향해 끝까지 주먹을 휘두른 한 작가의 걸작임에도 틀림없다. 한 관객으로서 내가 느낀 것은 결국 글은 모든 것을 말해 주지 않는다. 글이 가장 큰 힘을 가진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글은 자신을 숨기는 비겁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헤밍웨이(He Means Way)> 소개글에는 ‘누구를 위해 글을 쓸 것인가’라는 글이 등장한다. 누구를 위해서 또 무엇을 위해서 글을 쓰는가. 더러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말이 우스울 정도로 그냥 나를 지키려고 글을 쓰기도 한다. 문제는 그 글에 도움이 되는 대상을 정말 위해서 하느냐 하는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글은 총이 되기도 한다. 문득 앞에서 본 소개문이 총을 겨누려는 대상을 정확히 하라는 클래런스의 대사와도 겹쳐진다. 헤밍웨이는 총구가 겨누어지는 마지막 대상을 명확히 조준한 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글은 누구를 위해 만나든 누구를 겨냥할 수 있다. 문과 현실의 모순은 활자로 마음을 전달하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결국 질문을 바꿔볼 수도 있다. 누구를 위해서 글을 쓰는가. 혹시 거기에 방아쇠가 붙어 있지는 않았을까.

- 본 리뷰는 ‘2021 상우룰림 고전극장 서포터즈’ 활동 중 작성했습니다.
https://m.blog.naver.com/bebe_yourlove/222411849981 산울림 고전 극장 서포터즈의 첫 활동이다! 처음을 너무 좋은 작품으로 만나서 할 얘기가 너무 많아. 다음작… m.blog.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