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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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소장 개혁파…여전히 대표적인 차기 주자 소장 개혁파의 원조로 불린다. 원희룡은 한나라당 의원 시절부터 변화와 개혁의 목소리를 강하게 냈기 때문이다.이른바 남경필 새누리당 의원, 전 정병국 새누리당 의원이라는 개혁 브랜드를 얻었다.
원희룡이 유명해진 것은 1982년 대입 학력고사에서 제주도 출신으로 처음으로 전국 수석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고교 시절 전교 1등은 물론 전국 모의고사에서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연합뉴스
서울대 법대에 진학해 학생운동을 주도했고 1992년 사법시험 수석 합격으로 ‘수재’라는 꼬리표가 붙었다.짧은 검사 생활을 마치고 2000년 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서울 양천갑에 출마해 국회에 입성했다. 18대까지 연속 3선에 성공했다.
원희룡
초선 시절인 2002년 한나라당 미래연대 공동대표를 맡아 개혁 이미지를 쌓기 시작했다. 소신에 어긋나면 당·정의 방침에 반발하는 발언과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그리고 차세대 주자 이미지를 꾸준히 쌓았다.
2007년 17대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 이명박 당선자에 이어 3위를 차지하며 대선 후보 가능성을 보여줬다. 특정 계파에 속하지 않는 데다 개혁 성향임을 인정받아 2010년 당 쇄신특별위원장을 지냈다.
그러나 2010년 62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에 도전했고 경선 과정에서 나경원 전 의원과 후보단일화 경쟁에서 패하면서 꿈을 접어야 했다. 정치인생에서 1차 위기를 맞은 것이다. 그러나 곧이어 714 전당대회 이후 당 인사와 조직을 책임지는 사무총장에 취임하면서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다시 한 번 고비를 맞은 것은 2012년 427 재보궐선거 패배 이후다.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무총장에서 물러나 74 전당대회 때 당 대표에 도전했다. 19대 총선 불출마까지 선언하는 등 배수진을 쳤으나 실패했다. 총선 직후인 2012년 5월 영국으로 공부하러 출발해 현실정치와는 거리를 뒀다.
그리고 대선을 앞둔 11월 박근혜 후보를 돕기 위해 귀국했다. 박 후보의 열세 지역으로 분류되는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지역에서 지원 유세를 벌였다. 의원 시절 개혁을 주장하며 박 당선인과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박 당선인은 자신의 말을 끝까지 지키려고 노력하는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이라며 대선공약으로 내놓은 정치쇄신안을 확실히 추진할 것으로 믿고 있으며 꼭 그렇게 해달라는 부탁도 함께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대선 직후 다시 영국으로 향했다.당내에서는 보기 드문 얼리어답터(early adopter)로 불릴 정도로 디지털 정치에 관심이 많다. 트위터 마니아라고 불릴 정도로 트위터를 통한 양방향 소통에도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
원희룡TV차기 후보로 꼽히는 그는 머지않은 시기에 차기 정치 행보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출처_ (저서) 박근혜의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