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현미

대한민국 기독교인실의 현미 | Hyunmi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본명 김명선 출생 1937년 1월 28일 [1](84세) 평안남도 강동군 고천면 맥전리 [2][3] 국적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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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학력 덕성여자대학교 (가정학과/명예학사) 혈액형 O형 [4] 가족 배우자 이봉조 [5](사실혼), 슬하 2남 조카 노사연, 한상진 [6] 종교 개신교 데뷔 1957년 미8군 번안곡 O Danny Boy

  1. 개요 2. 생애 및 가수 활동 3. 결혼 생활 4. 여담 1. 개요 [편집]대한민국의 가수
  2. 재즈풍의 목소리로 한국적인 팝을 이끌었던 인물로 1962년 한국 드라마 밤안개(7)로 데뷔해 많은 인기를 끌었다. 90년대 이후 음악보다는 예능 위주의 활동을 해 젊은 세대에겐 별로 눈에 띄지 않을지 몰라도 음악계에선 이미자 패티 김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평을 듣는 대가수다. 하지만 이들보다 언니이자 선배다.[8] 2. 생애 및 가수 활동 [편집]8형제 중 세 번째로 14후퇴 때 부모, 6형제와 함께 남하했다. 당시 평양의 집이 무너지면서 조부모 집에 여동생 2명이 맡겨졌고 14후퇴 당시 피난길에 오르지 못하고 북한에 남았다. 해방 직후 두 여동생은 조부모 밑에서 자랐다고 한다. 2000년 남북이산가족 상봉 때 오빠를 대동하고 중국 옌볜에서 한 번 만났는데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3. 현미가 가수 데뷔한 동기는 이렇다 1957년 미8군 위문공연 무대 칼춤 댄서였던 현미는 방송을 펑크 낸 여가수 대신 무대에 올라 가수의 길을 걷게 됐다. 1957년 미8군 SHOW 무대에서도 활동했다. 당시 흔치 않은 여대생 가수라는 장점을 살려 현 시스터스라는 그룹에서 활동했고 그중에서도 센터를 담당했다. 당시 현미를 주목했던 작곡가 이봉조는 현미에게 아 목동아라는 팝송 번안곡을 만들어줬고 현미는 그때부터 본격적인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사실상 데뷔곡인 셈이다. 당시 곡을 녹음하던 현미의 성량이 워낙 커서 다른 가수들과 달리 몇 걸음 떨어져 곡을 녹음했다는 일화는 꽤 유명하다.
  4. 1962년 이봉조와 1집을 만들면서 미국 가수 냇 킹 콜의 곡에 현미본인이 직접 작사한 가사를 붙여 밤안개를 발표, 단숨에 스타덤에 오른다. 사실 원래 밤안개가 타이틀곡은 아니었지만 당신의 행복을 빕니다보다 인기가 높아지자 뒤늦게 교체해 재발매했다. 후속곡으로 갑자기 잘된 활동으로 62년째 새해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후 1960년대 대표적 여가수로 입지를 굳히며 당대 최고의 가수였던 한명숙과 한동안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5. 이후 보고 싶은 얼굴이라는 곡을 발표해 이산가족의 아픔을 표현한 자신의 대표곡 중 하나를 만들었다. 그 밖에 영화 「여행할 때는 잠자코」라고 동명의 곡을 발표해 히트 했다. 그 외에는 모두 내 사랑 연인 두 사람 등이 히트를 쳤다. 당시 이봉조가 지은 노래만 부르던 현미는 히트곡을 많이 발표해 한국 가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특히 이봉조가 해외 국제가요제에 집중하던 중 그리스 국제가요제에 현미와 함께 출전해 별에서 주요 부문에 수상했고 국내외 중저음 허스키하고 힘찬 성량의 보컬 능력도 인정받았다. 이러한 대중적인 인기와 인지도에 힘입어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취임 파티에 초대받아 한국을 대표하는 가수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6. 이봉조와 별거한 뒤에도 가수 생활을 계속하며 인기를 유지했지만 이 시기에 사실상 이봉조의 유작 ‘왜 살 것인가’와 2001년 ‘아내’를 발표해 히트시키면서 현미만의 가수 실력을 입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전에는 재즈풍 보컬로 한국 가요, 팝을 불러 히트했다면 90년대 이후부터는 성인 가요 트로트로 전향한 것으로 보인다.
  7. 2007년 데뷔 50주년 음반을 발매해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고 한국 최초로 50주년 기념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지금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어 최근에는 특유의 화술과 재치로 주로 외부 이벤트나 예능을 중심으로 출현하고 있다. 2020년 영앤리치 레코즈의 트로트 레슨을 맡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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