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종의 사랑이 낳은 창덕궁 낙선재
창덕궁 희정당 동쪽에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하고 단아한 고택처럼 보이는 낙선재(보물 제1764호). 창경궁 경계에 있는 낙선재는 조선 24대 왕인 헌종(재위 1834~1849)이 귀애하던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해 지은 궁궐이다. 후궁을 위해 궁궐 안에 건물을 새로 짓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후궁의 뒷모습마저 아름답다고 할 정도로 헌종의 후궁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후궁을 보기 위해 창덕궁 내에서도 크게 떨어진 동쪽에 궁을 지었다.
창경궁과도 담장 하나를 경계로 하고 있는 낙선재는 본래 낙선정이라 불리던 창경궁의 부속 건물이었다고 한다. 문화재청은 낙선재를 비롯한 석복홍·수강재·상량정·한정당·주운정 등을 낙선재 권역으로 보지만 좁게는 낙선재·석복홍·수강재만을 낙선재 권역으로 본다.
낙선재는 궁궐이라고 하기에는 소탈해 보이는 외관이지만 사실 담장과 문살무늬, 소품 하나하나를 낭비하지 않는 섬세하고 고급스러운 궁이다. 드러내지 않는 절제된 화려함이 숨어있는 궁이라 생각한다. 우리 고유의 전통에 당대 최고의 청나라 양식의 기술과 자재를 접목하여 지은 낙선재는 헌종의 검소함과 선진 문물에 대한 관심을 동시에 읽을 수 있다.

낙선재는 궁궐이라고 하기에는 소탈해 보이는 외관이지만 사실 담장과 문살무늬, 소품 하나하나를 낭비하지 않는 섬세하고 고급스러운 궁이다. 드러내지 않는 절제된 화려함이 숨어있는 궁이라 생각한다. 우리 고유의 전통에 당대 최고의 청나라 양식의 기술과 자재를 접목하여 지은 낙선재는 헌종의 검소함과 선진 문물에 대한 관심을 동시에 읽을 수 있다.
3개 권역에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던 낙선재와 오른쪽에 경빈김씨 처소 석복헌, 대왕대비 순원왕후(23대 순조비)의 처소 수강재가 나란히 서 있다. 건물 뒤편으로 화초·석물·꽃담 굴뚝 등에서 자란 아름다운 화계와 꽃담 너머로 상량정·한정당·취원정이 위치한다.

헌종이 낙선재를 짓고 경빈과 사이좋게 황태자도 낳고 오래 천수를 누리며 당시 세력을 뻗치던 세력도 때리고 증조부 정조와 같은 카리스마 넘치는 왕도정치를 했다면 훗날 조선이 허무하게 저무는 길을 피할 수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헌종은 낙선재를 지은 지 1년 만인 23세에 붕어한다. 22세에 요절한 아버지 효명세자보다 1년 더 산 것이다.
낙선재의 낙선은 선을 즐긴다는 뜻.

나가라쿠몬
낙선재 남행각에 위치한 정문. 현판은 흥선대원군 필체. 낙선재권역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 낙선재.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 낙선재.

석복헌 권역낙선재가 세워진 이듬해인 1848년 건립된 후궁 경빈 김씨 거처. 헌종 23세에 승하했을 때 경빈의 나이, 경빈의 나이, 18세였다. 왕이 붕어하면 후궁은 궁을 나가야 한다는 법도에 따라 경빈은 궁궐을 나와 사저에서 지냈다는 설도 있고, 인품이 착한 것을 아끼는 왕실 어른들의 배려로 궁궐에 살다가 77세까지 장수했다는 설도 있다.수강재 권역수강재는 1785년에 지어진 낙선재 권역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옛날 태조 때 수강궁 터였기 때문에 수강재라 불렀다. 당초 왕의 서재나 세자의 공부를 위해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효명태자가 대리청정할 때 별당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수렴청정이 끝난 순원왕후가 지낸 곳이기도 하다. 순원왕후는 정조의 사돈인 김조순(金朝順)의 딸로 헌종·철종 때 두 차례 수렴청정을 하여 세도정치를 반석에 올린 중심 인물 중 한 명이다. 수강재는 후에 덕혜옹주의 거처로도 사용되었다.수강재는 1785년에 지어진 낙선재 권역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옛날 태조 때 수강궁 터였기 때문에 수강재라 불렀다. 당초 왕의 서재나 세자의 공부를 위해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효명태자가 대리청정할 때 별당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수렴청정이 끝난 순원왕후가 지낸 곳이기도 하다. 순원왕후는 정조의 사돈인 김조순(金朝順)의 딸로 헌종·철종 때 두 차례 수렴청정을 하여 세도정치를 반석에 올린 중심 인물 중 한 명이다. 수강재는 후에 덕혜옹주의 거처로도 사용되었다.수강재는 1785년에 지어진 낙선재 권역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옛날 태조 때 수강궁 터였기 때문에 수강재라 불렀다. 당초 왕의 서재나 세자의 공부를 위해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효명태자가 대리청정할 때 별당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수렴청정이 끝난 순원왕후가 지낸 곳이기도 하다. 순원왕후는 정조의 사돈인 김조순(金朝順)의 딸로 헌종·철종 때 두 차례 수렴청정을 하여 세도정치를 반석에 올린 중심 인물 중 한 명이다. 수강재는 후에 덕혜옹주의 거처로도 사용되었다.헌종과 경빈이 떠난 후 낙선재 권역은 오랫동안 비어 있었으나 갑신정변(1884)이 일어난 후 고종이 잠시 집무실로 사용하였고 대조전 화재로 순종과 순정효황후가 석복헌을 침전으로 사용한 적이 있다.창덕궁상량정상량정은 1820년에서 1849년 사이에 지어진 정자로 낙선재 서북쪽에 위치한다. 본래 평원루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창덕궁 승화루승화루는 창덕궁 선정전과 희정당 근처에 있는데 낙선재 지역에 들어선다. 세자의 전용 도서실로 세련미가 돋보이는 이정자도 청나라풍을 접목해 지었다고 한다. 한때 일제가 조선 왕실을 감시하기 위한 창덕궁 경찰서로 사용한 작도 있었다.(이미지는 2021년 1월 28일 촬영)승화루는 창덕궁 선정전과 희정당 근처에 있는데 낙선재 지역에 들어선다. 세자의 전용 도서실로 세련미가 돋보이는 이정자도 청나라풍을 접목해 지었다고 한다. 한때 일제가 조선 왕실을 감시하기 위한 창덕궁 경찰서로 사용한 작도 있었다.(이미지는 2021년 1월 28일 촬영)승화루는 창덕궁 선정전과 희정당 근처에 있는데 낙선재 지역에 들어선다. 세자의 전용 도서실로 세련미가 돋보이는 이정자도 청나라풍을 접목해 지었다고 한다. 한때 일제가 조선 왕실을 감시하기 위한 창덕궁 경찰서로 사용한 작도 있었다.(이미지는 2021년 1월 28일 촬영)승화루는 창덕궁 선정전과 희정당 근처에 있는데 낙선재 지역에 들어선다. 세자의 전용 도서실로 세련미가 돋보이는 이정자도 청나라풍을 접목해 지었다고 한다. 한때 일제가 조선 왕실을 감시하기 위한 창덕궁 경찰서로 사용한 작도 있었다.(이미지는 2021년 1월 28일 촬영)승화루는 창덕궁 선정전과 희정당 근처에 있는데 낙선재 지역에 들어선다. 세자의 전용 도서실로 세련미가 돋보이는 이정자도 청나라풍을 접목해 지었다고 한다. 한때 일제가 조선 왕실을 감시하기 위한 창덕궁 경찰서로 사용한 작도 있었다.(이미지는 2021년 1월 28일 촬영)승화루는 창덕궁 선정전과 희정당 근처에 있는데 낙선재 지역에 들어선다. 세자의 전용 도서실로 세련미가 돋보이는 이정자도 청나라풍을 접목해 지었다고 한다. 한때 일제가 조선 왕실을 감시하기 위한 창덕궁 경찰서로 사용한 작도 있었다.(이미지는 2021년 1월 28일 촬영)승화루는 창덕궁 선정전과 희정당 근처에 있는데 낙선재 지역에 들어선다. 세자의 전용 도서실로 세련미가 돋보이는 이정자도 청나라풍을 접목해 지었다고 한다. 한때 일제가 조선 왕실을 감시하기 위한 창덕궁 경찰서로 사용한 작도 있었다.(이미지는 2021년 1월 28일 촬영)낙선재 앞마당도 뒤쪽 화계 단풍이 아름답다. 곱게 물든 낙선재 권역을 돌아보며 역사의 희비를 조용히 덮고 있는 계절이 위대하다는 생각에 젖는다. 반면 세상에 오가는 모든 것은 무상무상이 마지막 종착지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낙선재는 조선 궁궐 중 20세기까지 황실 가족이 살았던 궁이다. 박정희 정권의 배려로 귀국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를 비롯하여 순정효황후, 영친왕, 이방자 여사, 덕혜옹주가 낙선재에서 거주함으로써 대한제국 황실 가족이 근대와 현대에 걸쳐 실제 생활한 곳이다. 1989년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를 끝으로 다른 궁과 마찬가지로 낙선재는 아무도 살지 않는 궁이 되었다.2022년 11월 8일 창덕궁 낙선재에서2022년 11월 8일 창덕궁 낙선재에서